오늘 예전부터 보려고 별러왔던 케빈에 대하여(이하 케빈)를 봤다.
보려고 별러왔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영화가 결코 만만하게 보기 편한 영화가 아니라는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제 먹다 남은 피자 두조각을 데워와 한입 베어문채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곧 영화를 멈춰야 했다.
하필 첫 장면이 피의 축제인지 토마토 축제인지 모를 빨간색 범벅이었던 것이다.
흐물거리는 버섯과 감자의 식감이 역겹게 느껴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두 조각을 겨우 삼키고 난 뒤에야 영화를 재생시킬수 있었다.
영화는 내내 빨간색의 어떤것들로 가득차며,
우울함과 알수없는 불안감, 그 뒤의 서늘함의 정서로 가득하다.
귀여운 어린 아이의 눈빛에서 내뿜는 적의감과 적대감은
어른의 그것보다 훨씬 섬뜩하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책이 원작이라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것은 아니지만,
아마 우리 사회에서 있었던 '사이코패스'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행한 사건들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영화를 단순히 사이코패스는 가정에서 어떻게 태어나 길러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치부할수 없는 까닭은,
엄마라고 불리우는 사람에게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은채 그저 노려보기만하는 어린 케빈의 눈빛을
나도 주위에서 분명 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케빈을 그저 주변에서 목도할수 없는 특수한 케이스의 아이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대목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가장 서늘했던 대목은,
그런 '척' 하는 어른의 마음을, 아이도 느낄 수 있다 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 아이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말이다.
나는 일하는 곳에서 케빈의 적대심 가득한 눈빛과 비슷한 종류의 그것을 겪은적이 있다.
나에게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고 심드렁한 표정을 한 채 나를 쳐다보는 아이의 그 눈빛은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아이를 대할때 일종의 두려움도 갖게 했다.
사실 그렇게 아이를 피하기 전에는 그 아이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그 점은 분명 에바와 달랐다.
하지만 곧 나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된 후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심으로 대하는 '척'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것을 다 꿰뚫어 본다는 듯이 나를 적대감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럼에도 곧 영화 속 케빈의 말 처럼 그 아이의 그 눈빛에 '익숙' 해질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태도로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거의 평상심을 되찾고 아이를 대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냥, 세상에는 이런 아이도 있고 저런 아이도 있을수 있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넘길 일이 되었지만, 그때는 이렇게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어린 아이로부터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곧 해소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것은 에너지 소모가 상당히 큰 일이며
다른 백가지의 좋은 일들을 압도하는 일이다.
이 때의 일로 인해, 나의 말 한마디와 눈빛이 그 안에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아이들이 알아챌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 입이 무거워지며 경직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곧 내가 뱉은 말에 '진심'이 담겨있었는가 스스로 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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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글에서 썼던 아이들은 생일을 맞이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어느 기점을 중심으로 그 아이들은 그때 그 아이들과는 전혀 관계 없는 아이들인마냥
귀여운 아이들로 나에게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아이들과 마주할때마다 달려와서 안기고 안아주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지금도 놀랍다. 내가 지레 겁먹고 편견으로 아이들을 대했던것일까?
조금 더 거시적인 시점에서, 20년을 넘게 더 산 사람으로써 배포있게 애들을 바라보고 대했어야했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정신적으로 예전보다 얼마나 어른이 되었을까, 하는 질문이 머릿속에 자리한다.
